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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는 책-문희공 전기소설 (조선의 스승 劉敞 )제40화 4 дня наза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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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는 책-문희공 전기소설 (조선의 스승 劉敞 )제40화

실록 전기소설 조선의 스승 劉 敞 제 40 화 영상제작 유찬종(劉基燦) 지금의 막강한 세력에 도전할만한 구세력이 있느냐? 지금이야말로 조정을 접수하고 자기 더러 직접 보위에 나가는게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걸 얘기했다 “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어떻해야할지 결정할 수가 없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의 고견을 들어보고 정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지 유의랑의 고견은 어떤가? ” 그러자 유창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 지나간 역사를 보아도 똑같은 사건이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 같은 사건? ” “ 예 신라 시대지요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서 허우적 거릴 때 조정상하 모든 이들은 당시 새롭게 부상한 영웅 김춘추가 신왕이 되면 신라의 국운이 활짝 펴질 것이라며 그가 보위에 오르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렇게 권할 때 한마디만 했으면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춘추는 사양했지요 그런데도 권하니까 그는 선왕인 진평왕의 따님이었던 선덕(善德女王)을 추대하여 새 임금을 삼았습니다 그는 그런 뒤에 선덕 다음으로 왕이 되었지요 명군 김춘추는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된 것입니다 모든 여건이 충족되어 자신이 나가도 되는 왕위를 왜 선덕에게 양보했을까요? 여건이 충족은 되었지만 완벽하진 않다고 본 겁니다 김춘추는 임금은 성골(聖骨)만 될 수 있기 때문에 자기 같은 진골(眞骨) 출신은 될 수 없다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임금부터 됐더라면 정통성 시비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진골 출신이라도 괜찮다라고 조정상하 백성들까지 만장일치로 이해할 정도의 시기가 오기를 더 기다리기로 하고 자기 앞에 선덕이란 징검다리를 놓아 기회를 기다린 겁니다 장군의 약점은 이름없는 서민 출신이란 겁니다 하지만 왕이 될 분은 당신 밖에 없으니 나가라 한다고 그냥 나가면 반대 세력은 언젠가 무력정변으로 왕위를 찬탈했다고 공격할 수 있습니다 더 기다리시면 익은 감이 툭 떨어지듯 기회가 옵니다 김춘추처럼 그때 마지못해 왕위에 나가는 모양새를 취하십시오 “ 아, 고맙네 그대 말대로 하겠네 이성계는 머리를 쳐들고 있던 욕심을 버리기로 하고 창왕을 폐하여 강화로 추방하고 새 왕손을 찾기로 했다 “ 신종(神宗) 임금의 후손인 정창군(定昌君)이 지금 장단(長湍)에 기거하고 있습니다 정창군을 모셔오면 만백성도 이제야 올바른 혈통의 임금이 등극했다고 믿을 것입니다 정도전의 말이었다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이성계가 직접 장단까지 가서 정창군에게 그 뜻을 전하고 나서자 했으나 그는 손을 흔들었다 “ 나는 뜻이 없으니 그리 아시고 돌아가시오 그는 몇 번이나 사양을 하다가 마지못해 대궐로 나왔다 곧 즉위식을 하여 신왕 등극을 끝냈다 정창군이 새로운 임금(恭讓王)이 되었다 이듬해가 되었다 이성계는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로 취임하여 명실공히 전국의 군사권을 쥐게 되었다 자신이 펼쳐보고 싶던 국정도 과감하게 실시했다 제일 큰 문제가 전정(田政)이었다 국초 이래 왕건은 나라를 통일하자 각지방의 토호(土豪)세력을 우대했다 통일의 밑받힘이 된 것은 애초 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토호 세력이 전국의 농토를 분할하여 소유하고 일반 농민은 그들의 땅을 도지(賭地)하여 소작을 하고 있었다 농토를 찾이한 세력은 그들 뿐 아니라 권문세가(權門勢家)들도 그 세가 만만치 않았다 여기에 또 막대한 토지를 보유한 세력이 있었다 전국의 사찰(寺刹)이었다 불교를 국교처럼 숭상하는 나라이기에 사찰의 숫자가 막대했는데 나라에서는 그들 사찰에게 토지를 나누어주어 재산으로 삼게하고 백성들에게 토지를 빌려주어 착취케 했다 “ 농토는 일반 백성들에게 자작농지(自作農地)로 다 돌려주어야 마땅합니다 전지개혁이 없으면 나라의 회생은 가망이 없습니다 정도전이 개혁에 앞장 섰다 그는 우선 요동정벌 전쟁 준비를 할 때 전지에 대한 세금을 높게 매기기 위해 전적(典籍)을 조사 정리한 적이 있었다 제대로 된 전적은 많지 않고 위조하거나 남의 것을 빼앗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정도전은 그때 모아 놓은 수상한 공전(公田) 사전 전적들을 모두 한 곳에 끌어 내놓고 불을 질러버렸다 물론 그것은 정도전이 각부의 감찰(監察)과 감사를 맡고 있던 사헌대(司憲臺)의 사헌령이었기 때문에 직권으로 행한 것이었다 그때 곧바로 조민수 일파가 정도전과 전제(田制) 개혁론에 대해 들고 일어나 정도전과 개혁파를 비난했다 그러자 이성계파이며 정도전 못지 않은 전제 개혁론자였던 조준(趙浚)이 일어나 조민수를 탄핵했다 조민수는 최영과 함께 준비 없는 북벌전을 계획하고 시행에 옮겨 막대한 전비(戰費)를 탕진했으며 신돈의 피가 흐르고 있는 우왕과 창왕은 신돈과는 무관한 공민왕의 정통자손이니 배척하면 안된다고 우기고 그 같은 과오는 반성하지 않고 전제개혁에 앞장 선 정도전과 본인, 그리고 이성계장군까지 명예를 훼손했으니 탄핵을 받아 마땅하다고 치죄를 주장했다 조민수는 역부족으로 탄핵을 당하여 창녕(昌寧)으로 유배를 당하고 말았다 조정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유창은 호조에서 열심히 일을 했다 전제개혁 같은 과업을 해나가려면 정확한 종합자료의 정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요동정벌전을 준비할 때부터 하다가 저항세력의 반발이 만만치 않아 완수하지 못하고 중단했던 일이었다 9. 청주감옥(淸州監獄)과 신통한 유창의 예언(豫言) 묵묵히 고생하는 유창을 보고 이성계는 미안해 했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후 공로자의 행상(行賞)을 했었다 유공자의 명단에 당연히 올랐는데도 유창은 종군해서 한일이 없다며 끝내 사양하고 상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3개월쯤 지났는데 성균관 좨주(祭酒)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받게 되었다 기쁜 일은 승진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정3품관이 되었던 것이다 좨주라는 직위는 성균관에서 가르치고, 잘못을 바로 잡는 일을 하며 석전(釋奠)의 제향(祭享)을 관장하는 자리로 일이 있을 때만 나와도 되는 명예직이었으며 보통은 이조판서(吏曹判書)가 겸임하는 자리였다 직장을 성균관으로 옮기라는게 아니고 호조 일을 보면서 명예직을 겸임하란 것이었다 실록 전기소설 유창(劉敞) 제 40 화 끝 실록 전기소설 劉敞 제 41 화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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