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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 - 유관순 편 4 года наза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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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 - 유관순 편

1919년 2월 28일, 이화학당에 다니던 유관순 열사와 친구들은 3·1운동 추진 계획을 전해 듣고 만세 시위에 참가하기로 결심합니다. 3월 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 시위대가 이화학당 앞을 지나자, 유관순 열사와 학생들은 시위운동에 동참했습니다. 1919년 3월 10일, 학생들의 만세운동 시위가 극심해지자 조선총독부는 전국적으로 임시휴교령을 내리고, 유관순 열사는 사촌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몰래 독립선언서를 숨겨 귀향한 유관순 열사는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만세 시위운동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그녀는 인근을 돌아다니며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기독교 전도사인 조인원과 김구응 등의 인사들과 만나 4월 1일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거사 당일에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태극기를 직접 만들었고, 인근의 마을을 찾아가 아우내 장터에서의 만세운동에 대해 알렸습니다. 거사 전날이었던 3월 31일, 유관순 열사는 다음 날의 만세시위를 약속하고 다짐하는 봉화를 올렸고 목천·천안·안성·진천·연기·청주 등 각지의 산봉우리 24곳에서도 봉화를 올려 호응하였습니다. 1919년 4월 1일, 충남 천안 병천면 아우내 장터. 약 3천여 명의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에서 만세운동을 벌이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만세시위에서 부모를 잃은 유관순 열사는 천안헌병대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을 받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맞섰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법정에서도 민족적 기개를 잃지 않고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였습니다. 재판 이후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 유관순 열사는 옥중에서도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말미암아 18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순국하였습니다.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고통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 유관순 열사의 유언 * 그림 : 신동일 작가 * 국가보훈처 블로그 https://blog.naver.com/mpvalove * 국가보훈처 페이스북   / mpvakorea   * 국가보훈처 트위터   / hun2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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