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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역사스페셜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특집 - 1부 잊혀진 무장독립전쟁기지 5 лет наза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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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역사스페셜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특집 - 1부 잊혀진 무장독립전쟁기지

■ 1911년 6월, 옥수수 창고에서 독립군의 신화가 시작되다 1910년 겨울, 국내 최대 규모의 항일 비밀 조직 신민회는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을 계획한다. 노선은 대일 무장독립투쟁이고 그 무대는 중국 만주벌의 서간도이다. 국내에서 자행되는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을 피해 해외로 눈을 돌린 전략적 선택이었다. 이후 신민회 간부 중 한 사람인 이회영은 서간도를 둘러본 뒤 구체적인 망명계획을 세운다. 이항복의 후손인 이회영 집안은 대대손손 정승과 판서를 지낸 최고의 명문가였다. 이회영을 비롯한 6형제는 부귀영화 대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압록강을 건너기로 합의한다. 하지만 이국 땅에 이방인으로 자리를 잡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중국 토착민들의 경계와 일본의 감시 속에 1911년 6월에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신흥무관학교가 문을 연다. 대외적인 공식 명칭은 ‘신흥강습소’로 일본의 눈을 피하기 위해 무관학교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았다. 숨 죽이고 있던 독립에 대한 열망이 끓어오르는 첫 시발점이었다. ■ 대한제국의 청년들이 최정예 군사로 거듭나다. 교육과 훈련은 비밀리에 진행됐다.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산 속 연병장에서 철저한 군사 교육이 실시됐다. 우여곡절 끝에 독립전쟁기지를 건설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만주의 혹독한 추위와 부족한 식량이 문제였다. 그들에겐 학교생활 자체가 투쟁이었다. 훈련을 책임졌던 교관 김창환의 일화는 당시의 열악한 환경을 짐작케 한다. - 황명수, 신흥무관학교 교관 김창환의 막내 며느리 - "아버님에 관한 얘기 중에, 너무 흉년이 들어서 군량미가 없으니까 동냥을 해서 학생들이 손발톱이 다 빠졌대요. 아버님께서 그것들을 실로 꿰서 칠판에 걸고는‘내가 이만큼 해서 너희를 공부 시키니까 열심히 하라’고,‘우리나라를 위해서 살자’고,‘다같이 살자’고 하는 거니까…." ■ 전성기를 맞다 -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지청천과 김경천의 합류 1919년 5월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일본군 당국과 조선총독부를 충격에 빠뜨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군 장교 지청천과 김경천이 만주로 망명한 것이다. 국비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한 이들은 조선인으로서는 밟기 힘든 엘리트 군인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탄탄대로의 삶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결심한다. 현역 군인 신분으로 목숨을 건 망명이었다. 일본군 헌병대는 지청천과 김경천에게 5만엔의 현상금을 내건다. 생사를 건 탈출 끝에 합류한 두 엘리트 군인으로 인해 신흥무관학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독립의 열망에 일본의 최신 군사 교육법까지 더해져 전례 없이 강한 군사전문기관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후 이들은 독립군 장교와 사병을 양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독립운동을 활성화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준다. 또한 많은 한인 청년들이 만주로 모여드는 도화선이 된다. 이 때문에 신흥무관학교는 본교를 길림성 유하현 고산자로 옮기고 두 개의 분교를 두는 등 점점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 독립군 전투사의 대승첩, 청산리 전투의 대승을 이끌어내다 만주 일대 무장독립군의 세력이 날로 확대돼가자 일제는 독립군 진압을 위해 대규모 정규군을 만주에 출병시키는 계획을 수립한다. 이에 김좌진이 이끌던 독립군 부대인 북로군정서는 당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대다수 포진돼 있던 서로군정서에 도움을 요청한다. 러시아에서 사들인 체코제 무기를 다량 보유하고 있었지만 무장독립군으로 교육시킬 교관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북로군정서는 독립군 양성소인 사관연성소를 마련하고 신흥무관학교 출신 교관들을 중심으로 실전과 같은 군사 교육을 실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1920년 10월 독립군 전투사의 한 획을 그은 청산리 대첩의 기폭제가 되었다. 신역사스페셜 77회 -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특별기획 2부작 제1부 잊혀진 무장독립전쟁기지 (2011.8.11 방송) http://histor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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