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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 김익상 집 터 2 недели наза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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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 김익상 집 터

김익상(金益相, 1895∼1925)의 본적은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孔德里) 286번지로 지금의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이다. 조실부모한 탓에 넉넉하지 못한 성장기를 보냈다. 어려서 사숙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마포에 있던 삼호보성소학교(三湖普成小學校)에 재학 중 집안이 어려워 학업을 마치지 못하였다. 1919년경에는 서울 교북동(橋北洞)에 있던 연초회사인 광성연초공사(廣盛煙草公司)로 옮겨 근무하게 되었고, 1921년 6월경 봉천지점의 기계 감독으로 발령이 나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김익상은 매우 기뻤다. 어렸을 때부터 소원이 비행사가 되는 것이었는데, 중국으로의 전보 발령은 그 같은 꿈을 이룰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사는 비행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천진과 상해를 거쳐 비행학교가 있는 광동(廣東)으로 갔다. 하지만 당시 광동의 호법 정부는 북벌(北伐)에 치중하느라 비행 학교 운영을 일시 중지하고 있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김익상은 크게 낙심하여 상해를 거쳐 북경으로 갔다. 여기서 인생의 큰 전기가 된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의열단에서 조선총독부 폭파 지령을 받고 1921년 9월 서울로 잠입한 김익상은 9월 12일 전기수리공으로 가장하고 남산 중턱 왜성대 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비서과와 회계과에 폭탄 2개를 던졌다. 이 가운데 하나는 불발하고 회계과 에 던진 폭탄이 터져 기물을 파손하였으나 인명피해는 없었다. 거사 직후 피신하여 베이징으로 돌아온 김익상은 1922년 2월 상하이[上海]로 가서 동지 오성륜과 함께 3월 28일 오후 3시 반경 상하이 세관 부두에서 필리핀에서 도착한 일본 전 육군 대신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육군 대장을 향해 폭탄을 던지고 총탄을 발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일본 나가사키[長崎]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감형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일본인 고등계 형사에게 연행된 후 행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제작 202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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