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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미 - 잘있거라 황진이 (1956) 4 года наза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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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미 - 잘있거라 황진이 (1956)

노래 이야기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벽계수 낙마곡’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시조는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인 '황진이(黃眞伊)'의 작품이지요. 세종대왕의 아들 영해군의 손자인 벽계수, 그러니까 조선 중종 37년(1542년)에 송도(松都), 즉 지금의 개성(開城)에 부임한 왕족 출신의 관찰사(觀察使), 벽계도정(碧溪都正) 이종숙(李終叔)이 바로 벽계수라는 인물입니다. 황진이가 벽계수를 유혹하기 위해 지었다는 이 시조는 그저 뻔한 연애편지일 법도 하지만, 조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남아 우리에게도 친숙하지요. 어렸을 적 학교에서 이 시조를 배울 때에는, 흐르는 냇물이 바다에 닿으면 다시 돌아올 수 없으니 쉬엄쉬엄 가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했지만 정작 황진이 자신은 벽계수에 대한 구애의 의미가 더 컸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를 들은 벽계수가 그녀를 보기 위해 말 위에서 고개를 돌리다 낙마했다는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지요.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도 황진이라는 이름은 조선을 대표하는 명기(名妓)이자 서예가, 문학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황진랑(黃眞娘)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기생으로서는 명월(明月)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지요. 견우와 직녀의 얘기처럼 황진이 또한 가상의 인물이 아닐까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출신과 직업 때문에 조선의 정사(正史)에 황진이라는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금기시되다보니 야사(野史)와 구전들을 통해서만 그녀의 이름을 접할 수 있었기에 더 신비로운 인물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직업은 기생이었으나 아름다운 외모에 학문적 지식이 해박하고 시와 그림에도 뛰어난 자질을 갖추어 조선을 대표하는 여성으로서 역사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지요. 황진이와 함께 신사임당, 허난설헌, 이옥봉, 이매창 등의 이름들 또한 조선을 대표하는 여성 문예가로 알려져있지만, 현재 드라마나 소설, 영화 등에서 황진이의 존재감은 가히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간다 나는 간다 황진이 너를 두고 이제 가면 언제 오리 머나먼 황천길을 서화담 그리운 님 저승간들 잊을쏘냐 섬섬옥수 고운 손아 묵화치고 글을 짓던 황진이 내 사랑아 나는 간다 나는 간다 황진이 너를 두고 살아 생전 맺지 못할 기구한 운명이라 꽃 피고 새가 울면 님의 넋도 살아나서 내 무덤에 꽃은 피네 눈 감은들 잊을쏘냐 황진이 내 사랑아" '잘있거라 황진이'에서는 서화담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지요. 유교 사상이 만물의 이치를 깨우치는 정답이라 여겨지던 시기, 수동적인 교육 체계에 반기를 들며 스스로 깨달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던 조선의 학자 서경덕(徐敬德)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영특했지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그에게는 스승이 없었고 자연으로부터 가르침을 얻는다 했지요. '꽃이 있는 연못'이라는 뜻의 화담(花潭)을 호로 사용하며 독자적인 학문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의 명성을 듣고 개성과 서울 등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 왔고,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누구든 제자로 받아주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오늘의 주인공인 황진이도 있었지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여러 야사가 전해내려오고 있습니다. 황진이가 서화담을 유혹했지만 넘어오지 않았다는 설도 있고, 황진이가 어려운 문제를 내자 서화담이 쉽게 맞추면서 연인이 되었고, 얼마 후 서화담이 홀연히 떠나갔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이야기의 시작에서 언급한 '벽계수'를 비롯해 '서화담', '이사종', '소세양' 등 황진이의 남성편력은 광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로 인해 아름다운 시 구절들이 탄생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조민우 선생님의 '잘있어라 황진이'가 1956년 발표된 이후 저를 포함한 많은 가수들이 이 곡을 리메이크해 앨범에 실었습니다. 2005년에는 재미교포 팝페라 가수인 케빈육의 앨범에 제가 피쳐링으로 참여한 곡 '사랑이 무량하오'이 발표되기도 했는데, 이 노래는 황진이와 이사종의 계약 결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답니다. 3년은 이사종의 집에서, 또 3년은 황진이의 집에서 머물며 6년간 사랑을 나누며 함께 살았다고 전해지지요. 당시의 사회적 배경으로 미루어 볼 때 황진이는 상당히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만큼 전해 내려오는 그녀의 이야기가 특별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겠지요. 오늘 함께 감상하는 '잘있거라 황진이'의 가사에는 이별과 죽음을 표현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기록된 서화담과의 일화는 비극적인 결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만 작사가 박두환 선생님의 감정 이입으로 해석할 수 있겠네요. '꿈에 본 내 고향'으로 유명한 박두환 선생님은 평소 백석의 시를 좋아해 그것에서 영감을 받은 노래들을 많이 썼다고 합니다. 전설속의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노래 '잘있거라 황진이'. 역사 속의 한 장면이 대중가요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전통가요가 가진 주요한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예상밖의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을 노래, 오늘은 '잘있거라 황진이'를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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